해미성지

조회 수 4676 추천 수 0 2010.03.03 23:43:40

◇ 해미성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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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90년대에 순교한 박취득(라우렌시오)을 비롯한 순교자들은 1870년대에 까지 수십 명이 이름을 남겨놓고 있지만 그 외의 수천 명의 이름은 그들의 목숨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해미의 땅은 이렇게 알 수 없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쓰러져 갔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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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99년에 이보현과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고, 1814년에는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

(비오)가 10년 옥고 후 옥사 하였으며, 충청도 지방의 대대적 박해 시기였던 18159(을해) 년과 1827(정해)년 기간 동안에는 손여옥 등 수많은 신자들이 집단으로 체포되어 순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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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로 면천, 덕산, 예산, 등지에서 살던 천주교 신자들의 마을 을 해미 진영 군졸들이 수시로 급습하고 재산을 약탈한 후 신자들을 체포하여 해미 진영 서문 밖 사형장에서 처형하였다. 체포된 신자들 가운데엔 신분을 고려하여야 할 사람들(양반층) 은 상급 치소인 홍주, 공주, 서울로 이송되었으며 대부분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심리 절차(기록) 없이 해미에서 처형되어 글자 그대로 무명신자들이 수천 명 순교한 곳이 해미 땅이다.

 

* 해미는 일찍이 천주교가 전파된 내포 지방의 여러 고을 가운데서 유일하게 진영이 있던 군사 요충지였다. 1418년에 병영이 설치되었고. 1491년에 석성이 완공된 해미 진영(사적 116호)은 1790년대로부터 백 년 동안 천주교신자들을 무려 3천 명이나 국사범으로 처결하였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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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매장 순교지 여숫골

 

 * 동구 밖 서쪽의 나무가 우거진 곳이었기에 " 숲정이 "라 불리던 곳이다. 오늘엔 논으로 가꾸어진 벌판이지만 병인년 때에는 숱한 천주학 죄인들이 산 채로 묻혔던 곳이다.

 

  이 뼈들은 수직으로 서 있는 채 발견 되었다 하는데 그것은 죽은 몸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이 묻혔다는 증거이다 산 사람들이 묻히던 어느 날엔 함께 묻힐 동알 가운데에 어여쁜 규수도 있었다 한다.

* 묻기를 명할 순간에 형장의 눈에 들어온 규수의 자색은 그 형장의 연민을 자아내었다. 어여쁜 얼굴에 어찌 사학을 하여 죽는 몸이 되었는냐고 , 살려줄 터이니 사학을 버리라고 꾀었으나 입술을 깨물고 그 규수가 먼저 구덩이에 뛰어 내리니 동아리 가운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묻히더라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 온다. 그날 묻히던 그 찰나에 하늘이 천둥으로 합성하고 사흘을 안개로서 생무덤을 덮어 주더라고 전해 온다.

 

  묻히던 순교자들이 한결같이 하늘에 외쳐대는 소리가 있었으니, "예수, 마리아! "라는 간구였다, 허나 구경꾼들이 듣고 전하여 준 오늘까지의 동리 사람들 말로는 " 여수머리"라 하여 여우 홀린 머리채로 죽어 갔다고 해서 이 숲정이를 "여숫골" 이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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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언도를 받는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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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야나무에 달린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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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울음 듣는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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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길 함께 가는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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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를 달게 받는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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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의 문턱 넘는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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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명 순교자 묘

 병인 박해 때 해미 생매장 순교 현장을 목격했던 이주필, 임인필, 박승익 등의 증언에 따라 1935년 서산 성당 범 베드로신부가 생매장지 일주를 발굴하여 순교자들의 유해 및 묵주, 십자가를 수습하여 서산군 음앙면 상홍리 공소 뒷산에 안장하였었다. 1995년 순교자 대축일에 이를 다시 해미 성지로 이장하여 본래의 순교터(현 순교자 기념탑 앞)에 모셨다. 상홍리 순교자 묘소 자리에는 십자고상과 진토가 된 순교자 유해 일부를 모셔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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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구에 내쳐진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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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 길로 가는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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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개길 당하는 순교자

 

 * 서문 밖 순교지에서 순교자들의 목숨을 빼앗는 방법은 가지가지였다. 돌로 쳐 죽이기도 하고, 돌구멍에 줄을 꿰어 목에 옭아 지렛대로 조여 죽이기도 하고, 묶어서 눕혀 놓은 여러 명을 돌기둥으로 내리 눌러 죽이기로 하였으며, 얼굴에 백지를 덮고 물을 뿌려 질식시켜 죽이기도 하고, 나무에 매어 달고 몽둥이로 죽이기도 하였다.

 

  

  특히 잔인하게는 돌다리 위에 연약한 순교자를 서너 명의 군졸들이 들어 올려 자리개질(태질) 하여 머리와 가슴을 으스러지게 하기도 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시 양촌 사람 방영창 안토니오 등 수많은 분들이 순교하였다. 꿈틀거리는 몸이 있으면 횃불로 지져 숨을 끊어 버렸다. 이 자리개돌은 서문 밖 순교 성지 일부를 확보하여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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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박혀 죽으신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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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셔 내리신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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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둠벙에 내쳐진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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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매장시 키러 가는 길에 큰 개울을 만나게 된다. 개울을 건너는 곳에 외나무 다리가 있었고,그 밑에는 물길에 패인 둠벙이 있었다. 두 팔을 뒤로 묶이어 끌려오는 사학 죄인들을 외나무 다리위에서 둠벙에 밀어 넣어 버리기도 하였다.

 

* 묶인 몸으로 곤두박질 당한 죄인은 둠벙 속에 처박혀 죽었다. 이 둠벙에 죄인들이 떨어져 죽었다 하여 동리 사람들 입에 " 죄인 둠벙 " 이라 일컬어지다가 오늘날에는 말이 줄어서 " 진둠벙 " 이라 불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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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채로 묻혀버린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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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 묻히신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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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6(병인)년 이후 몇 년 간의 대 박해 동안에만 순교한 숫자를 1천명에 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1790년대부터 희생된 순교자가 3천여 명으로 추천된다.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는 박취득(라우렌시오)등 수십 명 뿐이다.

 


주소: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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