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온수리교회

조회 수 5577 추천 수 0 2012.10.09 10:23:35

◇ 강화 온수리교회 ◇



* 온수리교회는 인천내동교회, 서울대성당에 이어 1906년 우리나라에서 3번째로 설립된 성공회 교회다. 온수리에 성공회가 들어온 것은 1900년 어간이다. 1896년 트롤로프(M. N. Trollope) 신부와 힐라리(F. R. Hillary) 신부, 그리고 평신도 로스(A. F. Laws) 등 세 선교사가 강화에 부임하면서 성공회 선교는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의사인 로스는 강화읍 만이 아니라 진료를 요청하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 로스는 한 해 3,400명을 진료하였고, 오래지 않아 로스(한국이름 노인산)는 강화 전역에서 유명한 이름이 되었다. 이처럼 로스의 진료소가 좋은 반응을 얻자 강화읍에 있던 힐라리 신부도 이곳으로 옮겨와 교회와 학교(진명학교)를 시작하였다. 로스와 수녀들의 보살핌으로 병을 치료 받은 사람들이 은혜를 갚는 심정으로 교회에 나오는 경우가 늘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전도를 받아 나오는 부모들도 늘었다. 

* 온수리교회는 영국 신부들이 지은 것인데도 강화성당과 달리 언덕 마루가 아니라 기슭에 자리잡게 된 사연이 있다. 지금 성당 오른쪽 언덕엔 본래 무덤이 널려 있었는데 언덕 위에 집 짓기를 좋아하는 영국인들이었지만 차마 남의 무덤을 파 엎으면서가지 교회를 지을 수 없었는지 무덤이 없는 북쪽 기슭으로 비껴앉아 터를 닦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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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라리 신부(길강준, 1904-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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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덕 신부(1912-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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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곳은 27칸의 기와를 얹은 단아하고 아담한 한국형 한옥의 성당이라는 점이 역사적 보존가치로 인정돼 2003.10.27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52호(사제관 41호)로 지정됐다.

 

 * 온수리교회의 아름다움은 그 소박함에 있다. 규모 면에서 정면 3칸, 측면 9칸, 도합 27칸 되는 일자형 전통 한옥으로 40칸 규모의 강화성당에 미치지 못하고 지붕도 단층 팔작지붕으로 평범하다. 지붕 용마루 양쪽 치미의 십자가 장식과 지붕 양쪽 끝 합각 벽면에 벽돌로 새긴 십자 장식을 빼놓으면 관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건물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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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군 길상면의 온수리교회는 1906년 영국인 주교 조마가(Mark N. Trollope)가 지은 성당 건물로 우리나라의 초기 서양 기독교 교회양식의 건물이다.  온수리교회는 을사보호조약과 한일합방으로 인해 조선군과 일본군 사이에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교회에 기를 게양해 조선군에게 여러 가지 정황을 알려주는 역할도 했다. 또한 이 교회는 한 세기가 넘는 긴 세월을 선교뿐만 아니라 의료선교, 교육사업에도 적극적으로 헌신했다. 지금은 푸두마켓을 통해 어려운 노인들을 섬기며 지역아동센터 희망터 공부방을 통해 농촌지역에서 소외당한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있다.

 

 

* 온수리 성당 내부는 강화성당과 마찬가지로 ‘바실리카’ 양식을 취하고 있다. 열두 사도를 상징하는 열두 개 기둥으로 지성소와 회중석을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강화성당 구조와 달리 측랑이 없고 회중석 가운데 복도가 남녀 석을 구분하고, 후진이나 고창층 같은 전형적인 바실리카 양식을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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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시대 성곽의 망루 같은 분위기를 담고 있는 성공회 온수리교회. 솟을지붕 아래에는 옛날 영국 해군에서 기증한 종이 맑고 고운 소리를 내었으나, 일제 말기 때 일본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 지성소가 전체 면적의 반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강화성당과 달리 온수리 성당의 성소는 전체 면적의 6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아 ‘회중 중심’의 교회 건물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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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산에거 아람드리 소나무를 가져오고, 서울에서 경복궁을 지었다는 도목수를 데려오고, 인천에서 중국인 석수를 데려다 지은 강화성당과 달리, 온수리 성당은 이곳 교인 집 뒷산에서 베어온 소나무를 이곳 목수들이 다듬고, 이곳 흙으로 구운 기와를 이곳 사람들이 올려 지은 집이기에 훨씬 토속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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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 불은면 출신으로 1901년 힐라리에게 세례를 받은 한학자 구건조의 개종은 당시 강화 지역의 지식인 계층에게 성공회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구건조의 도움으로 당시 강화 온수리 지역에서 위세당당한 세력가였던 광산 김씨 집안의 김영선, 김영지 두 형제가 성공회 교인이 된다. 그 중에서 김영선은 신학을 공부하고 1924년 사제 서품을 받고 고향 교회인 온수리 성당에 부임하여 은퇴하기 까지 3-년 동안 이곳에서만 목회하였다.

  이처럼 김영선, 김영지 형제가 믿기 시작하자 광산 김씨 집안에서 교인이 나오기 시작했고, 김씨 집안에서 땅을 붙여 먹고사는 소작인들과 하인들이 따라나왔다. 이처럼 온수리의 세도 집안인 광산 김씨 형제가 나오게 되면서 지역사회에서 교회의 위상도 점차 확고하게 자리잡아 나갔다. 교세는 강화읍보다빠른 속도로 성장하였다. 1906년 난저골에 15칸 성당을 건축하였으나 이내 좁게 되어 5년만에 새 건물을 지었으니 지금 위치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 성당은 건축비 반 이상을 온수리 교인들이 부담했고, 여기서도 광산 김씨 집안에서 큰 몫을 차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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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안에는 설립 당시부터 사용되고 있는 설교대(독경대)와  6각형모양의 목재로 제작 된 성천대가 있으며, 설교대에는 한자로 ‘永遠과 眞理(영원과 진리)’라고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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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수리 광신 김씨 문중 출신인 김여수는 일제 말기 인천상고에 다닐 때부터 ‘잔디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해서 한글 보급과 학병 반대 운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기도 전인 1944년 2월 25일 22세의 젊은 나이로 대전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3·1독립만세운동 당시 일제는 강화에서 일어난 3·1만세시위운동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진행하고, 그 연루자 42명을 체포한 뒤 혹독한 고문과 갖은 악행을 다한 후에 석방했는데 이때 온수리교회 신자 신태윤과 신태의가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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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췌문헌

이덕주, 2002, 『눈물의 섬 강화 이야기』, 대한기독교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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