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절두산 성지

조회 수 6789 추천 수 0 2010.03.02 00:36:28

◇ 서울 절두산 성지 ◇



* 잠두봉은 양화나루 옆에 솟아있는 20m 높이의 암벽으로 근래에는 절두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곳은 1866년 병인양요 때 방어기지로 활용되기도 했으며, 천주교가 처음 우리나라에 유입될 때 이곳에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죽음을 당하였다.


  두 차례의 병인양요가 프랑스 측의 실패로 끝나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열되어 1867년과 1868년 초까지 도처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순교하였다. 대원군은 전국에 명하여 천주교도들을 남김없이 색출해 내도록 하였으며, 11월 23일에는 성연순 등을 체포하여 강화도에서 교수형에 처하고, ''천주교 신자는 먼저 처형한 뒤에 보고하라''는 선참후계(先斬後啓)의 영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함대가 양화나루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고, 조선의 강역이 서양 오랑캐들에 의해 더럽혀졌다.''는 구실 아래 ''양화나루를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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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10월 22일에 효수형을 받은 이의송(프란치스코), 김이쁜 부부와 아들 이붕익, 10월 25일에 효수형을 받은 황해도 출신의 회장 박영래(요한) 등이었다. 그리고 이후로는 효수형뿐만 아니라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기도 하였으며, 또는 몽둥이로 처 죽이는 장살로, 얼굴에 한지를 붙이고 물을 뿌려 숨이 막혀 죽게 하는 백지사(白紙死, 일명 도모지) 등으로 계속하여 순교자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교회 안의 전승에 따르면, 순교자들의 피는 잠두봉 바위를 물들이면서 한강에 흩뿌려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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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잠두봉 정상에 순교자를 기리는 기념관을 세우고, 1866년 순교한 28위의 유해를 비롯하여 천주교의 발자취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각종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 대원군이 자신의 쇄국 정책을 버티어 나가기 위해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함으로써 당시 절두산에서만 무려 1만여 명의 교우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되지만 그 수가 맞는지 틀리는 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이곳은 개화기의 혼란 속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역사의 현장으로서 보존 가치가 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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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두산 순교성지 봉헌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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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두산에서의 기록에 있는 맨 처음 순교자는 이의송 일가족을, 그 해 10월 22일 부인 김억분, 아들 이붕익과 함께 함수됐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하지만 그 일가를 비롯한 30명 남짓 외에는 전혀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무명 순교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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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21년 충청남도 쇨뫼(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제준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장하면서 그는 하느님과 겨레에 전 생애를 바치고자 성직자의 길을 택하여 1836년 마카오로 건너가 신학문과 신학을 익혀 한국인 최초의 신부로서 1945년 8월17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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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는 짧은 생애나마 오직 복음전파에 전력하였으며 하느님과 겨레의 구원을 위해 1846년 9월16일 새남터에서 목숨까지 기꺼이 바쳐 영원한 삶을 입증하였다.  

 

* 기념관 광장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 오타 줄리아의 묘, 박순집의 묘, 남종삼 성인의 흉상과 사적비 등이 마련돼 있기도 하다. 특히 순례자들은 부친, 형제, 삼촌, 고모, 형수, 조카, 장모, 이모에 이르기까지 한집안 열여섯 명의 가족들이 한꺼번에 치명한 박순집(1830-1912년) 일가의 이야기가 새겨진 비석 앞에서 가슴 뭉클한 감동을 가눌 길이 없다.

 

* 웅장하게 세워진 절두산 기념관은 순례성당과 순교 성인 28위의 성해를 모신 지하묘소 그리고 한국 교회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수많은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돼 있는 전시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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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교요지 판목

 * 주요교지 판목은 정약종이 한글로 쓴 최초의 교리서이다. 필사본으로 전해져서 읽혀지던 이책은 병인박해 직전인 1864년에 목판본으로 간행 되었으며, 그 목판본 판목들이 남아서 박해를 이긴 신앙을 증언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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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1년의 편지

 *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 신자들은 교회재건 운동에 착수했다. 신자들이 다시 북경의 주교와 연락을 취하게 된 때는 1811년이었다. 이 편지에서 신자들은 조선교회의 상황을 교황에게 보고하고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줄 것을 간절히 요청했다. 이 편지는 바티칸의 인류복음화성에 소장되어있는데 이번 특별전시회를 위해 편지가 보내졌던 모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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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주실의

 

 * 천주실의 : 예수회 선교사 마태오 리치가 저술하였으며 중국과 서양학자가 질문 대답하는 대화체 양식으로 기술된 천주교 교리서이다.1603년 북경에서 간행된 후에 전 한문 문화권으로 전파되어 갔고 한국 초기 교회 창설 과정에서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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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사울 출토유물

 내포의 사도로 불리던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1752-1801)이 살았던 충청도 여사울(현재 예산군)에서 1969년 6월 18일에 발굴되었다. 이 성물들은 초기 교회 때 중국에서 들여온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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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고상

 동정부부 유중철과 이순이의 십자고상 신유박해 때 전주에 살던 동정부부 중철 요한, 이순이 누갈다와 그의 시부 유항검과 시모 및 시동생 등 일가족이 순교했다.  이 십자가는 그 가족들의 묘소를 조남천에서 전주 치명산으로 이장할 때 발견되었다.   


* 주소: 서울 마포구 합정동 96-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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