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풍 선교기념관

조회 수 7823 추천 수 0 2010.03.10 20:00:04

◇ 이기풍 선교기념관 ◇


    


  이기풍 목사는 1907년 9월 7일 한국장로교회의 처음 목사안수를 받은 7명 중 한 분으로 우리나라 첫 선교사가 되어 제주도에 파송되었다. 선교사로 부임하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제주도에 표착하였다. 굶주림과 괴로움을 이겨내며 복음 선교를 감당하였고 또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일제 고문의 후유증으로 여천 우학리교회 목사관에서 순교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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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풍 선교사의 초기 사역 모습

 

  마포삼열은 “평양에서 한 Police 가 돌을 던져 턱을 깨뜨렸다.”라고 한 다음에 “그는 지금 제주도에서 선교사로 일한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그가 바로 이기풍 선교사이다.

  * 최초 7인 목사 안수기념 사진

(1907년 9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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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풍 선교사 제주부임기념 가족사진

  1908년 2월 20일 목포에서 제주도를 향하여 조사 한 분과 승선하였으나 소식이 없다가 44일 만에 무사도착이라는 전보를 목포의 가족들에게 보내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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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풍 선교사가 애송하던 성경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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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 가두판매로 전도를 시작

 

PIC5F.jpg* 성안유치원 설립 기념사진

 

 

 * 이기풍 목사는 한 젊은 정신이상자의 극적인 만남을 통해 제주선교의 문이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하루는 이기풍 목사가 한 청년을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 청년은 거리를 활보하며 아무에게 행패를 부려 주민들을 불안에 떨게 하던 정신이상자였다. 집에서 못나가도록 쇠사슬로 묶어 매어두지만 소용이 없었다. 쇠사슬도 가볍게 풀고 나돌아 다녔다. 주민들은 그 청년에게 귀신이 붙어서 그렇다고 했다.

 

  이기풍 목사는 청년을 집으로 데려간 후, 그가 행패를 부리거나 도망치지 못하도록 줄로 묶어 놓고 부인과 함께 열심히 십자가와 보혈 찬송을 부르며 기도했다. 청년은 기도하는 사이에 발악을 하다가 묶어 놓은 것을 풀고 도망가고는 했다. 그러면 이기풍 목사는 다시 잡아다가 앉혀 놓고 찬송하며 기도했다. 그러기를 며칠간 반복하는 사이에 이기풍 목사와 사모는 많이 지쳐 있었다. 그러나 이 청년이 온전해지느냐 온전해지지 않느냐에 따라 제주선교의 성패가 가름난다고 생각했기에 전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렸다.

 

 

 그런데 하루는 청년이 몹시 얌전하게 굴었다.  이기풍 목사는 마음에 짚이는 것이 있어 청년에게 말을 걸었다. “어제까지는 묶어 놓은 것을 잘도 풀고 도망치더니, 왜 오늘은 풀이 죽어 꼼짝 못하지?” 그러자 청년이 “어제까지는 우리 대장이 묶어 놓은 것을 풀어 주었기 때문에 그랬지. 그런데 오늘은 우리대장이 풀어주지 못해”라고 기가 죽은 소리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에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왜 대장이 풀어주지 못하느냐?”고 이기풍 목사가 물었다. 그러자 청년이 저기 대장이 보이지 않느냐는 듯이 손짓으로 담장을 가리키면서, “보세요. 저기 흰옷 입은 군사들이 창을 들고 이 집을 빙 둘러싸고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 대장이 겁이 나서 들어오지 못하는 거예요. 당신이 자꾸 노래하고 기도하니까 우리 대장이 더욱 힘을 못 쓰잖아요”라고 대꾸하는 것이었다.

 

  이기풍 목사는 그 말에 더욱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부인과 함께 식음을 전폐하고 밤이 깊도록 찬송과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갑자기 청년이 입에서 흰 거품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잠시 후에 그만 푹 꼬꾸라져 깊은 잠에 떨어졌다. 그리고 다음날 늦게까지 푹 자고 일어나더니 “제가 왜 여기에 와있죠?”라고 의아해 했다. 이기풍 목사는 청년의 손을 힘껏 쥐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그간의 일을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청년과 그 가족들은 모두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소문이 제주도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각종 병자들이 모여들고, 각처에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12년에는 8개 교회에 교인수가 4백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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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풍 목사가 사용하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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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8년 이기풍 목사가 설립한 제주성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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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9년 이기풍 목사가 설립한 제주성읍교회

 

  이기풍 선교기념관은 우리나라 장로교 최초의 목사이신 이기풍 목사의 제주도 복음선교와 일제의 신사 참배를 반대하다가 순교하신 신앙심과 애국정신을 전승하고자 한국교회가 힘을 모아 세운 기념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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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년 평양신학교 폐교시, 평양신학교 졸업식에 입는 가운을 입으시고 기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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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제 10회 총회장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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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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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풍 목사 선교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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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풍 목사 제주선교기념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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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제일교회 화순 묘지에 있는 이기풍 목사와 윤함애 사모의 묘

 

* 이기풍 목사의 약력

 

1868. 11. 21 평양에서 출생       /   1890 평양에서 마포삼열 목사를 구타함

1896 소안련 목사에게 세례를 받음

예수 믿고 세례 받은 후 황해도, 함경도, 원상, 평양 등지를 오가며 매서직

(성경책을 판매하면서 전도하는 것)으로 전도함 1903 평양신학교 입학

1907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 25세 윤한애씨와 결혼

1907 9월에 목사 안수를 받음. 졸업하는 해 9월 한국 장로회 총회에서 안수를 받음

1907 제주도 선교사로 독노회 파송,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가 됨

1909 독노회 제3회 부회장 피선   

1913 전남 광주교회(후에 광주양림교회, 광주제일교회, 광주중앙교회가 된다) 초대 목사로 부임

1917 대한 예수교장로회 10대 총회장 피선

1919 전남 순천교회 시무          /  1923 고흥읍교회 시무

1925∼1930 제주도 2차 전도       /  1930~11935 무교회 지역에 타요한 선교사와 같이 전도함

1935 전남 여수군 남면 우학리(섬)에서 목회

1942. 6. 20 주일 아침에 고문의 후유증으로 여천 우학리교회 목사관에서 순교(75세)

 





* 주    소: 제주도 북제주군 조천읍 화흘리 산14-3번지

* 전화번호: 064)782-6969                                 * 홈페이지: //www.leekipo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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