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인 총신대 양지 캠퍼스에 복원된 소래교회 ◇




* 중국에서 인삼장사를 하던 서상륜이 1879년 중국에서 세례를 받고 로스 목사를 도와 성경 번역에 착수하여 1883년 최초의 성경 마가복음을 발간한다.


* 서상륜 서경조 형제에 의해 1883년 5월 16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솔래리에 한국 최초의 개신교회인 소래교회가 세워진다.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기록되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1885년 4월 이 땅에 들어오기 2년 전의 일이었다. 이 교회는 1896년 증축되어 16칸 기와집 예배당으로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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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3년 초가집 소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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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래교회 서경조 목사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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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원된 소래교회

 

* 일제 강점기 소래교회는 개신교의 영향력이 강한 서북지방에서 규모는 작지만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교회였다. 해방 후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선 후 교회 신자들이 대거 남한으로 내려오면서 문을 닫은 것을 지난 1988년 총신대 구내에 복원했다.

  북한 땅에 있던 약 3200개의 교회 중에서 유독 소래교회만 남한에 복원된 것은 이것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우리나라의 첫 번째 개신교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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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1988년 총신대 양지 캠퍼스에 기와집 예배당이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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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정은 1882년 일본의 농학자 쓰다센을 만나 예수를 영접하고, 1883년 야스가와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 이수정은 1884년 12월 일본에서 최초로 마가복음서를 한글로 번역 출간하였다. 1885년 4월 한국 선교사로 첫 번째 입국하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그 마가복음서를 가지고 들어왔다는 사실은 한국 기독교 역사 가운데 매우 뜻 깊은 일이다.

 

* 일본에 머물며 전도활동과 성서번역에 헌신한 그는 국내 보수파에 의해 유인되어 1886년 귀국하자마자 수구파 정적의 손에 무참히 처형당함으로써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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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3년 5월 도쿄에서 개최된 제3회 일본기독교대회에 참석한 이수정(앞줄 오른쪽 네 번째)과 그에게 신약성경을 주었던 쓰다센(앞줄 오른쪽 다섯 번째), 유명한 성서학자인 우치무라 간조(앞에서 두 번째 줄 오른쪽 다섯 번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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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주 사람으로 인삼 장사를 위해 만주를 오가던 서상륜(1848∼1926)은 장사에 실패하고 형 상윤이 장티푸스에 걸려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었을 때,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 로스 목사와 매킨타이어가 구조의 손길을 폈고, 정성을 다한 간호를 받아 병석에서 일어나자 아우 경조와 함께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1879년 형제가 로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 후 로스 목사의 성경 조선어 번역을 도와서 일을 했고 출판이 끝나기까지 로스 목사와 함께 지냈다.

 

* 1883년 그는 이렇게 완성된 성경 100권을 지니고 압록강을 넘어 국내 잠입을 시도했다. 하지만 밀입국을 시도하던 서상륜은 입국 도중 관헌에 발각되고 만다. 구사일생으로 성경 10여권만을 지닌 채 탈출한 그는 가족의 고향인 황해도 소래로 피신하여 그곳에 정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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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가집으로 시작한 소래교회는 서씨 형제의 열성적인 전도로 활기를 더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전체 58세대 중 50세대가 교회에 나올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 

* 형이 서울로 활동무대를 옮긴 후 소래교회를 이끈 이는 동생 서경조(1852∼1938)였다. 그는 1901년 문을 연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편입해서 1907년 한국인 최초의 목사 7인 중 한 명이 됐다. 

* 언더우드가 1887년 초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시작했을 때 처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소래교회 신자들이었다. 또 그해 9월 장로교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세워졌을 때 그 주축이 된 것은 서상륜을 비롯한 소래교회 출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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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봉석(최권능) 목사 기념비

 

 1910년대 평양거리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다 일제에 의해 순교한 것으로 유명한 최봉석(최권능) 목사의 기념비도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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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권능 목사

 

 * 그는 예수를 위해서 무식한 바보가 되었지만 그분만큼 예수를 많이 드러낸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그는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 70여 개의 교회를 세웠다.

 훗날 한 경직 목사는 그분을 가리켜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 성령의 사람, 전도의 사람, 사랑의 사람, 순교의 사람이라고 증거 하였다.

 

 * 낙제생이었던 최권능 전도사가 졸업이후에 더욱 열정적으로 만주 등을 돌며 죽음의 고비 등 숱한 고난과 싸우며 복음 전도하여 28개 교회를 세웠습니다. 12년 동안 만주 압록강 전도활동을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온 최 목사는 평양복음화를 위해 새벽부터 ‘예수천당’으로 하루를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평양시내의 모든 상가들은 최목사의 새벽을 깨우는 ‘예수천당’소리를 들으면서 가게 문을 열고 결국 그 사람들이 모두 평양의 대 부흥의 주역들이 되었습니다. 길선주 목사는 “최봉석 목사의 ‘예수 천당’소리가 멈추는 날 한국의 예루살렘인 평양이 망한다.”고 말하며 최 목사를 격려하며 돌보아주었다고 합니다.

  최 목사는 일본의 신사 참배를 앞장서서 반대하다가 1939년 평양 경찰서에 끌려가서 극심한 고문을 당하면서도‘예수 천당, 예수 천당’ 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형사가 매를 멈추고 왜 이렇게 시끄럽냐고 물으니까 “내 몸에는 예수가 꽉 차 있어서 나를 때리면 내 몸에서 예수가 나옵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는 예수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극도로 몸이 쇠약해진 최 목사는 병보석으로 평양 기홀 병원으로 옮겨져 15일 동안 의사와 간호원과 가족들의 따뜻한 간호를 받으며 찾아오는 교우들을 다 만나보다가 1944년 4월 25일 오후 1시에 부인과 아들과 딸과 며느리와 손자와 산정현교회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에서 전보가 왔구나, 나를 오라고 하신다" 하면서 찬송가 "고생과 수고 다 지나간 후"를 부른 다음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품으로 옮겨 갔습니다. 그의 나이 75세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하신 지 4일 후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4월 21일 최 권능 목사님은 4월 25일 순교하셨습니다.

 평양의 어두운 밤하늘을 밝게 비치던 두 개의 큰 별이 4일 간격으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최권능 목사의 생애는 '예수 천당'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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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기철 목사 기념 기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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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신개교 100주년 기념예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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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치: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제일리 산41-11

* 전 화: 031) 338-7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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